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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말들_은유

갱파카 2020. 9. 15. 00:43

이 책은 작가님이 접하셨던 책들의 말과 주위에서 겪었던 경험을 엮어 독자에게 전달해주는 방식으로 쓰여 있다. 막연히 두루뭉술하거나 추상적이지 않고 일상에서 접해볼 법한 이야기들을 통해 따뜻함과 교훈을 주기에 "다가오는 말들"을 추천한다. 

 

다가오는 말들 _ 은유

 

"나는 인터뷰를 하고 글쓰기 강의를 진행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깊고 내밀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이다. 삶을 위무하고 지혜를 안겨주는 보석 같은 이야기들을 선물 받는다. 혼자만 알기 아깝다. 이야기 전달자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 이 이야기들이 내게 그랬듯이 다른 이들에게도 일상의 쉼, 생각의 틈을 열어주기를, 공감의 힘을 길러주는 말들로 다가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세상에서 내게 온 이야기를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낸다." 와 같은 작가님의 말과 함께 나 또한 여러분들에게 책의 좋은 대목을 전해드리려 한다.

 


1. 《아름답거나 아릿하거나, 날카롭거나 뭉근하거나. 타인의 말은 나를 찌르고 흔든다. 사고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그렇게 몸에 자리 잡고 나가지 않는 말들이 쌓이고 숙성되고 연결되면 한 편의 글이 되었다. 이 과정을 꾸준히 반복하면서 남의 말을 듣는 훈련이 조금은 된 것 같다. 무엇보다 큰 수확은 내가 편견이 많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2. 《나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틈틈이 관찰한다. 야쿠르트 아줌마, 버스 운전기사, 학원 가는 아이를 보면서 저 이는 어떠한 삶의 사정과 행로를 거쳐 지금 여기에 있을까 상상한다. 한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적어도 무작정 혐오하기는 어렵다. 누구라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서로 아무런 삶의 연결고리가 없을 때 더 쉽게 혐오하지만, 서로의 삶이 한 자락이라도 섞이면 이해하고 공감할 여지는 꼭 생긴다.

 

 

3. 《나도 20~30대엔 애매함을 배척하고 확실함을 동경했다. 표류보다 안착을 원했다. (...) 어영부영 이만큼 떠밀려오고 나서야 짐작한다. 인간이 명료함을 갈구하는 존재라는 건 삶의 본질이 어정쩡함에 있다는 뜻이겠구나. 이제 나는 확신에 찬 사람이 되지 않는 게 목표다. 확실함으로 자기 안에 갇히고 타인을 억압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싶다. '글쓰기는 이런 거야', '사는 건 원래 그래' 라고 의심하기보다 주장하는 사람이 된다는 건 서글프다. 언제 잊었는지도 모르는 첫사랑처럼 순간 멀어졌던 그것, 무수한 사유의 새순을 피워 올리는 '어정쩡함' 이라는 단어를 이 봄에 다시 내 것으로 삼는다.

 

 

4. 《우연히 만난 이들의 모범 답안 같은 그것. 버스 장면을 몇 번 돌려봤다. 언제 밥 한 번 먹자고 말하지 않아서 좋았다. 흔해 빠진 관용구로 인연을 복제하는 건 시시하니까. 자기가 나의 고요를 침탈한 건 아니냐고 물어봐주어 고마웠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람의 말씨는 다정하니까. 기억에 검은 발자국만 남기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다음에 또 만났을 때 싫음이 올라오면 곤란하니까.

 

 

5. 내쫓김의 불안보다 소모됨의 불행이 컸다. 퇴근 후 독서와 집필이 힘에 부쳤다. 감정의 수문이 열릴까 봐 음악을 줄였다. 영화 관람에도 소홀했다. 반응 기회를 잃어감에 따라 감응 능력도 퇴화했다. 도식화된 문서를 생산하며 관료적 언어에 길들여졌다. 돈이 들어오는 대신 체력, 생각, 감각, 음악, 언어, 몽상, 눈물같이 형체 없는 것들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6. 《점점이 흩어져 홀로 고행하던 여성들이 말할 때, 나만 힘든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공유할 때, '고통의 언어화'로 자기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때 엄마들의 봉기는 인공자궁에 버금가는 혁명이 되지 않을까 나는 상상한다.

 

 

7. 《요즘 나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감정에 익사당하지도, 폭포 같은 눈물에 잠식되지도 않는다. 재무구조가 개선되지는 않았지만 집은 넓어졌고 조용히 울 수 있는 방도 생겼는데 예전보다 덜 운다. 나이 들면 머리숱이 줄고 생리 양이 줄듯이 눈물도 줄어드는 걸까. 가끔 그 때가 그립다. 이제는 체력이 달려서 그리고 그만큼 슬프지가 않아서 완창을 할 수가 없다. 살면서 완창은 그리 자주 오는 것이 아닌가보지? 한 세월이 갔다. 눈물도 잦아들고 눈물의 목격자도 떠났따. 멀리서 지켜봤을 거 같다. 내가 모처럼 사연 있는 여자처럼 한바탕 운 그 사연을 나의 스물 두 살 자동차는 알리라.

 

 

8. 사랑은 특별한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치 않다는 점에서 쉽고, 자기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점에서 어렵다. 그러니 사랑을 얼마나 해보았느냐는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당신은 다른 존재가 되어보았느냐. 왜 사랑이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비활성화된 자아의 활성화가 암울한 현실에 숨구멍을 열어주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존재의 등이 켜지는 순간 사랑은 속삭인다. '삶을 붙들고 최선을 다해요.'

 

 

9. 《인간 사회는 민폐 사슬이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사회성을 갖는다. 살자면 기대지 않을 수도, 기댐을 안 받을 수도 없다. (...) 배제를 당하면서 자란 '키즈'들이 타자를 배제하는 어른이 되리란 건 자명하다. 건강한 의존성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관계에 눈 뜨고 삶을 배우는 어른이 될 수 있다.

 

 

10. 《다정한 얼굴을 완성하는 법 - "그의 영화는 보는 이에게 요청한다. '그들의 애인이, 그들의 가족이, 그들의 친구가, 그들의 동료가 되어보십시오. 그러니까 그들이 되어보세요.' 이때의 되어보기는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라는 가상 체험이면서 동시에 나는 과연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를 되돌아보는 현실 체험이다." 켄 로치의 '되어보기의 망토'가 공용화되는 세상을 상상했다.

 

 

11. 《페미니스트보다 무서운 것 - 꽃처럼 예쁘단 말은 그 자체로는 덕담 같지만 한 사람이 꽃이 되는 순간, 발화자가 언제든지 꺾어버릴 수 있는 수동적 존재가 되고, 꾸밈노동을 강요받는다. 여성이 직장에서 '꽃'으로 취급되며 개별적 주체나 실력으로 인정받기보다 성적 대상화와 폭력에 노출되는 게 그 증거다.

 

 

12. 《아름다운 낭비에 헌신할 때 -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은 무모함, 빠져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부어댈 때 잠깐의 흘러넘침, 그것이 사유의 결과물로 손에 쥐여진다. 이 아름다운 낭비에 헌신할 때 우리는 읽고 쓰는 존재가 될 수 있다.

 

 

13. 《작가가 되려면 얼마나 책을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도 곧잘 나온다. 나는 네루다의 이 시를 읽어주고 싶다.

 

"내가 책을 덮을 때 / 나는 삶을 연다 / 책들은 서가로 보내자, / 나는 거리로 나가련다. /

나는 삶 자체에서 / 삶을 배웠고, / 단 한번의 키스에서 사랑을 배웠으며 /

사람들과 함께 싸우고 / 그들의 말을 내 노래 속에서 말하며 /

그들과 더불어 산 거 말고는 / 누구한테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었다"》

 

 

14. 침묵은 정지의 시간이 아니라 생성의 시간이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지만 아무 말이나 하지 않으려 언어를 고르는 시간, 글을 쓴 이의 삶으로 걸어들어가 문장들을 경험하고 행간을 서성이고 감정을 길어내는 활발한 사고 작업의 과정이다.

 

 

15. 《한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든 신체적 온전함과 존엄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후원금을 척척 내는 어른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부모님 뭐하시느냐' 다짜고짜 묻는 어른이 많아져야 하고 이력서에 가족관계를 쓰지 않도록 하는 제도가 생겨야 한다. 이 세상에 '불쌍한 아이'는 없다. 부모 없이 자란 자식이라는 굴레를 씌우고 불쌍한 아이를 만들어내는 집요한 어른들이 있고, 정상가족이라는 틀로 자율적 존재를 가두거나 배제하는 닫힌 사회가 있을 뿐이다.

 

 

16. 《이분법의 유혹 - 네 시간 넘는 집회에서 1~2분도 안 되는 시간에 흘러나온 혐오성 구호만 자극적 이슈로 남았다며, 혐오 발언이 옳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말하려는가 들어달라고, '말투에 트집을 잡는 사람은 대화에 집중하지 않는 것' 이라는 그의 일침을 ('오빠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여자)선배에게도 전했다. 기성의 관념에 갇히는 건 게으름 탓 같다. 특히 이분법은 사유의 적이다. 생각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누구나 기성세대가 된다. '선입관이 현실을 만나 깨지는 쾌감'은 세상에 자기를 개방할 때만 누리는 복락이다.

 

 

17. 태어나면서부터 여성은 침묵하는 법을 익히고 남성은 감정을 도려내는 법을 배운다. 말하기를 익히지 못한 여성이 공감을 배우지 못한 남성과 동료 시민으로 살아가자니 여기저기서 삐걱거리고, 맞추어 살자니 공부가 끝이 없다.

 

 

18. 《슬픔만 한 혁명이 어디 있으랴 - 내게 눈물은 길조다. 모두가 웃는 행복한 나라가 아니라 누구나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 사회를 바랐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이성복의 시구가 긴 병명처럼 세간에 오르내릴 정도로 무감각의 일상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호환마마보다 두려웠다.

 

 


책은 총 5장(챕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3장까지 읽은 내용 중 나에게 다가왔던 대목들을 가져와보았다. 타인을 대하는 방법, 편견을 인식할 수 있는 또는 내려놓을 수 있는 방법, 글 쓰기로 얻을 수 있는 것들 마지막으로 아직 페미니즘에 대해 거부감이 드는 사람들을 위한 말들. 1번부터 18번까지 내가 겪었던 경험들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그러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까 여기서 이만 줄이도록 하겠다. 다른 작가님에서부터 은유 작가님에게로, 은유 작가님에서부터 나에게로, 나에서부터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로 생각의 틈이 열려져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